봉준호 감독이 영화마다 숨겨놓은 계단의 의미

봉준호계단상징

🎬 계단 하나에 이렇게 많은 게 담겨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퇴직하고 나서 처음 몇 달은 솔직히 뭘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30년 넘게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는 생활만 해왔으니까요. 그러다 자연스럽게 영화관을 들락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두 편 볼 때도 있었고, 집에서 예전에 못 봤던 것들을 다시 꺼내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냥 “재밌다, 없다”가 아니라 뭔가 더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군요.

이 글을 쓰게 된 건 사실 별것 아닌 계기였습니다. 기생충을 세 번째 다시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에 계단이 참 많이 나오네.” 그냥 지나쳤던 장면들이 갑자기 달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봉준호 감독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훑기 시작했습니다. 마더, 살인의 추억, 설국열차, 옥자까지. 근데 막상 찾아보니까, 계단이 없는 영화가 없는 겁니다. 그냥 배경으로 쓰인 게 아니라, 뭔가 의도가 있어 보였습니다.


🪜 직접 영화들을 다시 보면서 느낀 것들

제 기억이 맞다면, 기생충에서 계단 장면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나뉩니다. 올라가는 계단, 내려가는 계단, 그리고 아예 지하로 사라지는 계단입니다. 처음 볼 땐 그냥 집 구조 때문이려니 했는데, 다시 보니 캐릭터의 상황이 계단의 방향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더군요.

기택 가족이 박 사장 집에 처음 들어갈 때는 항상 올라갑니다. 언덕길을 오르고,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집 안으로 들어섭니다. 근데 이상하게 그 장면이 설레는 동시에 불안했습니다. 제가 직장 생활 할 때 윗분들 집에 처음 초대받았을 때 그 느낌이랑 묘하게 비슷했습니다. 반갑고, 감사하고, 근데 어딘가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은. 그 감각을 봉준호 감독이 계단 하나로 잡아낸 겁니다.

반대로 지하 공간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근세가 숨어 살던 그 계단은 빛이 없습니다. 카메라도 내려갑니다. 보는 사람도 같이 내려가는 기분이 들게 만듭니다. 사실 저도 처음엔 그냥 연출 기법이려니 했는데, 네 번째 보면서야 알았습니다. 그 계단은 존재를 지우는 통로라는 걸요. 사람이 사람 밑에 숨어 살아야 한다는 것, 계단이 그걸 말하고 있었습니다.

살인의 추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형사들이 논두렁 밑 좁은 길로 내려가는 장면들이 유독 기억에 남습니다. 그 장면에서 계단은 아니지만 경사진 내리막이 계속 등장합니다. 사건이 해결되지 않을수록, 캐릭터들은 점점 더 낮은 곳에 있게 됩니다. 의식적인 연출인지 무의식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봐도 봐도 그냥 우연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걸 알고 보니 영화가 완전히 달라 보였습니다

봉준호 감독 영화에서 계단이 가진 가장 큰 의미는, 제 생각엔 “수직 사회의 시각화”입니다.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 아주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 그 사이를 이어주는 게 계단이고, 봉 감독은 그 계단을 통해 계층 이동이 얼마나 가파르고 험한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직장 생활 30년 동안 저도 나름 조직 안에서 올라가고 싶었습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욕망이니까요. 근데 돌이켜보면, 올라가는 건 언제나 좁고 가팔랐고, 내려오는 건 순식간이었습니다. 기생충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밤, 기택 가족이 산 위에서 반지하로 내려가는 그 장면. 저는 그 장면이 그냥 영화적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의 진짜 인생이라고 느꼈습니다. 올라가는 데 평생이 걸렸지만, 내려오는 건 하룻밤이더라는 것.

설국열차에서도 계단은 아니지만 구조적으로 똑같은 논리가 작동합니다. 앞칸과 뒤칸이 수평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도 수직입니다. 앞으로 갈수록 올라가는 거고, 뒤에 있을수록 내려가 있는 겁니다. 봉 감독은 계단이라는 형태가 없어도, 어떤 공간이든 수직의 위계를 집어넣는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솔직히 아쉬웠던 점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계단의 의미를 찾아가는 게 재미있긴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한편으로는 좀 피곤하기도 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이 계단은 뭘 뜻하는 거지?” 라고 생각하다 보면, 정작 이야기에 감정적으로 빠져들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분석하면서 보는 건 분명히 다른 즐거움을 주지만, 처음 봤을 때 그 순수한 감동이 옅어지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또 한 가지. 봉준호 감독의 계단 연출이 너무 유명해지다 보니, 이걸 과도하게 해석하는 글들이 많아졌습니다. 어떤 건 “저 계단의 각도가 37도인데 그게 계급 격차를 상징한다”는 식의 과잉 해석도 있더군요. 제 기억이 맞다면 봉 감독 본인도 인터뷰에서 모든 게 의도된 건 아니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술가의 무의식적 선택도 분명히 있을 텐데, 그걸 전부 분석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면 영화가 좀 딱딱해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좀 개인적인 불만인데, 기호학적 해석이라는 게 결국 보는 사람의 경험과 배경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거든요. 같은 계단 장면을 보고도 저는 직장 생활을 떠올렸지만, 20대 친구들은 또 다른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쓰는 이 글도 어디까지나 58년 먹은 평범한 아저씨의 해석이라는 점을 솔직히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 자주 받는 질문들에 대해 답해봤습니다

Q. 봉준호 감독이 계단을 의도적으로 사용한다고 본인이 말한 적 있나요?

직접적으로 “나는 계단을 계층의 상징으로 쓴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인터뷰는 제가 찾은 범위 안에서는 없었습니다. 다만 공간과 수직 구조에 대한 관심은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고, 기생충 시나리오 작업 과정에서 계단이 핵심 공간 요소였다는 건 제작 노트 같은 데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의도와 무의식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보는 게 가장 솔직한 답일 것 같습니다.

Q. 계단 말고 봉준호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상징이 또 있나요?

있습니다. 음식이 굉장히 자주 나옵니다. 기생충의 짜파구리부터 살인의 추억의 복숭아까지, 뭔가를 먹는 장면이 중요한 순간마다 나옵니다. 그리고 냄새라는 감각도 반복됩니다. 기생충에서 냄새가 계층의 경계를 만드는 방식은 계단만큼이나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계단이 시각적 상징이라면, 냄새는 후각적 계층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봉준호 영화를 이렇게 분석하면서 보는 게 처음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나요?

솔직히 반반입니다. 처음 보는 그 몰입감과 감동은 분석으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근데 두세 번 봤을 때, 이런 상징들을 찾아가면서 보면 전혀 다른 층위의 재미가 생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처음엔 그냥 느끼고, 두 번째부터 생각하면서 보는 걸 추천드립니다. 봉 감독 영화는 그 두 가지를 모두 허락하는 드문 작품들이라고 생각합니다.


🎞️ 마무리하면서 드리고 싶은 말

퇴직하고 나서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할 때, 솔직히 영화가 그냥 시간 때우는 수단 정도였습니다. 근데 봉준호 감독 영화들을 여러 번 다시 들여다보면서, 영화가 꽤 깊은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계단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긴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됐으니까요.

이 글은 특히 이런 분들께 드리고 싶습니다. 기생충을 한 번 보고 재밌었는데 뭔가 더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분들, 영화를 좋아하지만 분석은 어렵게 느껴졌던 분들, 그리고 저처럼 일 끝나고 나서 뭔가 새로운 재미를 찾고 싶은 분들입니다. 거창한 공부 없이 그냥 한 장면 한 장면 다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영화가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계단 하나가 사회 전체를 담을 수 있다는 것, 봉준호 감독이 저한테 가르쳐준 것 중 가장 오래 남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영화 한 편 꺼내보려고 합니다. 이번엔 또 어떤 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기대감만으로도 충분히 설레는 오후입니다.

개인정보처리방침 | 이용약관 | 문의하기